안동여행, 임청각 석주이상룡선생 생가여행

안동여행,
임청각 석주이상룡선생 생가여행

"독립운동가 석주이상룡선생의 생가방문했어요."

 

안동여행 시 방문해야할 곳 중에 임청각이 여행일정에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동 근처에 살고 있지만 저에게는 안동은 여행하는 곳이기도 하거든요. 세련되고 편리한 도시에서 살다가 작은 도시로 이사오고나서 어색했던 옛 한옥을 이제는 저에게 매력이 넘치는 건축으로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한옥 중에서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을 방문하고 싶었답니다. 

임청각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민속촌에서만 보던 한옥에 실제로 살고 있고 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임청각이라하면 현재 존재하는 한옥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집으로 알고 있고 독립운동가 석주이상룡선생의 생가라고 알고 있지요.   

 

임청각의 소개

임청각은 집터가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고 건물마다 높이가 달라요. 건물 사이마다 사이담과 일각문으로 여러 채를 구분해 놓았어요.

바깥 행랑채
안쪽행랑채 입구

바깥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안쪽 행랑채가 있어요. 안쪽 행랑채에 들어가면 석주이상룡선생의 역사와 그의 업적에 관해 전시를 해 놓았더라구요.

안쪽 행랑채에서 바라본 입구

바깥행랑채에서 본 사랑채로 들어가는 계단입구에요. 사랑채 마당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 같아서 사이문을 통해 군자정으로 갔어요.

군자정 정면

군자정의 정면 모습이에요. 군자정의 마루는 지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고상형이라고 해요. 군자정의 구조는 왼쪽으로 방이 3칸있고 작은 마루방 1칸이 있어요. 그리고 정문으로 보이는 곳과 오른쪽은 넓은 대청마루가 있구요.

 

보물 제 182호이고 조선중기에 지은 T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형 누(樓)로 되어 있고 별당 건물로 지어졌다고 해요. 이 곳 바로 옆에 연못을 만들어놨더라구요. 이 날 역사공부하러 오신 어르신들이 연못에 둘러서서 얘기하셔서 살짝 비켜있었어요. 안 들리는 척하며 이상룡선생의 일대기를 잠깐 듣기도 했지요. 

군자정 대청마루

군자정 누의 바로 아래 대청마루 밑을 보았는데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중국과 일본의 마루는 자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게 만들었고 우리나라 마루는 소리가 안나게 단단하게 만들어졌다고 했어요. 

이 곳은 군자정 입구에서 바라보면 동쪽방향인데 사당입구에요. 사당에는 원래 4대 위패를 봉안하였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하여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다고 해요. 

 

임청각의 역사

조선 중기의 정자형 별당건축물이고 우리나라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1519년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임청각을 지었고 18세기 무렵 고성 이씨의 11대 종손 허주 이종악이 집주인이 되었어요. 이후 임청각을 물려받은 이상룡선생은 1911년 1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 이준형에게 임청각 역시 처분하라고 했지요. 그러나 문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만들어 주면서 말렸다고 해요. 

 

 임청각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

 

이 싯구에서 '임' 자와 '청' 자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임청각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중앙선 부설을 핑계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마당 한 가운데에 철길을 내어버렸는 것으로 유명하죠. 해방 이후에는 1963년 1월 21일 '안동 임청각정침군자정' 의 명칭으로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9월 '안동 임청각' 으로 명칭이 바뀌었어요. 2018년 9월부터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2025년까지 중앙선 철로가 놓이기 전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되었어요. 

 

석주이상룡선생과 그의 가족들

안쪽 행랑채에 전시해 놓은 역사유물들이 있었는데 이 곳은 정말 엄숙함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석주이성룡선생과 그의 가족들이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었어요.  

이준형은 십여년간 일제에 의해 끈질긴 협박과 변절의 요구를 받아오던 중, 아들 병화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했다고 해요. 

 

이상룡선생의 외아들 이준형의 유서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도증 형제의 학업은 비록 토지를 팔고 가산을 축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가르치도록 하여라" 

"오직 관대, 공평, 정직 여섯 글자로 삶의 비결을 삼아라."

 

 

그리고 독립운동을 가능케 한 임청각의 여인들이 있지요. 그들 중 이준형의 아들 이병화의 처 허은이라는 여인이 있었어요. 독립운동에 버팀이 된 여인들 종부 3대는 이상룡선생의 부인 김우락, 며느리 이중숙, 그리고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가 계셨죠. 특히 허은 여사는 1915년 가족을 따라 만주로 망명, 17살에 석주이상룡선생의 손자며느리가 되어 평생 목숨 걸고 일본과 맞섰다고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어요. 이들의 희생이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온 것이죠. 

이상룡선생은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상가, 계몽가이자 평생 명예와 부가 보장된 임청각의 종손이었어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하인들을 해방시키고 모든 가상을 처분해 50여 가구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여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민족의 큰 지도자로 활동하셨죠.

만주 망명 후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을 이끌며 만주 독립운동계를 지도하셨구요.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셨어요.

 

나라를 떠나면서

 

더 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까닭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남아가 제 일신을 아끼랴

고향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석주이상룡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읊은 시를 읽으며 나라의 지도자셨다고 가슴에 새겼어요. 석주이상룡선생에 관한 역사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임청각 옆에 작은 길로 다시 내려오면 고성이씨의 고택이 있어요. 고택의 정면에 '안동법흥사지 칠층전탑' 이 있는데 이 탑도 국내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라고 해요.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고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이 곳에 위치하고 있지요. 

이번 안동여행으로 임청각 석주이상룡선생의 생가를 방문에서 고성이씨 종택과 법흥사지 칠층전탑까지 짧은 시간에 많은 역사를 공부하고 온 기분이었어요.  

 

임청각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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